노인일자리법의 탄생
2023년 10월 31일 노인일자리법(정식 명칭은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이하 ‘노인일자리법’)이 제정되어 올해 11월 1일부터 시행된다.
2022년 6월 나는 본지 제7호에 칼럼(제목: 노인일자리법안, 시장을 넘어 공동체로)을 쓰면서 3개나 되는 노인일자리법안이 2024년 6월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될 슬픈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인일자리법이 지난 10년 넘게 통과되지 않은 이유를 길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이 무색해지게 임기 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국회에서 2023년 10월 여야 모두가 노인일자리법안에 찬성(투표 의원 248명 중 246명 찬성)하였고, 2024년 봄 정부에서는 하위법령을 마련하는 데 분주하다.
2년 전에 전문가랍시고 본지의 지면을 빌려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빗나간 예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지를 편집하는 분들의 배려로 다시 지면을 얻게 되었다. 이번에는 왜 법이 통과된 것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고,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노인일자리법을 어떻게 키우고, 무엇을 자양분으로 하여 지속가능하게 만들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노인일자리법의 탄생 배경과 의미
정부의 노인일자리사업은 2000년대 이후의 어느 순간부터 정치적 영역에 포섭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91년 제정된 고령자고용촉진법(현 ‘고령자고용법’)에 의해 법의 영역에서는 고령자고용을 담당하는 고용노동부가 제도화된 역할을 지난 30여 년간 수행해 왔다. 반면에 법의 영역 밖의, 독자적 법령 없이 수행된 보건복지부가 담당하는 노인 일자리사업은 점차 그 규모가 증가하여 예산이 증가되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사업방식을 시행하여 지역의 노인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예산의 증가와 참여자 및 이해관계인의 증가는 은연 중에 정치적 힘의 원동력이 된다. 거리에 노인일자리 예산이나 참여인력의 확대를 홍보하는 정당이나 국회의원의 플랜카드를 보거나 노인일자리 예산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국회에서는 정부 내 고용노동부의 이견과 노인일자리법과 중첩되는 고령자고용법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 국회의원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노인일자리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노인일자리사업의 이러한 정치적 성격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은 논리나 비판, 근거와 설득에 앞서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고, 법이 중복되든, 감당하기 어려운 예산이 투여되든, 다른 정부 부처가 반대하든 입법적 결단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입법 이후의 그 뒷일은 정치적, 정책적 판단과는 구분되는 법에 맡긴다. 이렇게 하여 노인일자리사업은 노인일자리법이 되었다. 이제 이 법은 탄생하였고, 정책이나 사업이 아닌 법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법은 영생불멸은 아니더라도 장기간 유지되며, 정책이나 정치와는 독립된 영역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그 기본이념과 목표에 따라 항해하게 된다.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제 임의로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책이 바뀌고, 예산이 끊기고, 인력이 없어도 법은 스스로 존재하며, 거꾸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서 규정된 법의 임무를 수행하고, 집행하기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예산과 인력을 계속 투여하여야 한다.
노인일자리법은 아직 그 기본이념이 없다. 다만 제1조에서 그 목적을 노인이 일자리와 사회활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노후생활을 영위하도록 지원하고, 이를 통한 노인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법은 그 기본이념이나 목적이 있어야 방향이 설정되는데 노인일자리법은 사실상 그러한 방향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 법이 목적하고 있는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노후생활은 개인의 주관적 기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미래의 방향을 이끌고 갈 만한 지향성과 법원칙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결국 2024년 11월 시행될 노인일자리법은 자신의 나아갈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령자고용법처럼 노인에게 직업을 가지도록 하여 고용안정과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고용시장에서의 시장노동을 목표로 삼을수도 없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목표를 노인일자리법은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비시장노동을 꿈꾸는 것이다. 시혜적인 복지도 아니고, 고용시장에서 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되는 것도 아닌 노동을.
법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미래를 꿈꾼다. 그것이 아이의 것이든, 자신의 것이든. 그러나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부모는 이제 아이를 통한 미래를 꿈꾸기 어렵고,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도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미래의 노년의 생계와 더불어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관계와 일상을 계획하여야 한다. 올해 시행될 노인일자리법이 이러한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람에 대한 지원이나 도움을 생각하면 늘 지금의 국가주도의 복지시스템을 떠올린다. 굶주린 사람이 없도록, 질병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의료와 서비스, 물품이 지급된다. 거기에는 국가의 예산이나 기금이라는 재정지원이 전제된다. 노인일자리법도 마찬가지이다. 조 단위의 예산이 투입되고, 그것은 참여노인에게 임금이나 보수라는 이름으로 지급된다. 2023년 11월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4년에는 2023년보다 10% 이상 확대된 103만 개의 일자리가 제공되고 예산도 1.5조 원에서 2조 원으로 대폭 확대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예산이 없으면 노인일자리사업은 멈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인일자리 예산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또한 그 예산을 늘리지 않으면 재정지원 노인일자리 숫자는 전체 노인 인구의 증가를 따라갈 수 없다.
노인일자리에서는 경제성이나 생산성 같은 것은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고용노동부의 고령자고용법은 고령자를 생산성이 발현되고, 요구되는 시장에 끊임없이 진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만 기대할 것이 많지는 않다. 시장이 거절하기 때문이다. 노인일자리사업도 그러한 시장을 겨냥한 사업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노인에게 시장은, 그리고 시장에게 노인은 편하지 않은 관계이다. 사람의 생애와 생로병사를 고려해 보아도 위계질서와 장시간 노동이 요구되는 임금노동은 노인에게 적절하지 않다. 다른 노동을 상상해야 한다. 그 상상을 노인일자리법에 담아야 한다.
무엇을 자양분으로 할 것인가?
예산이 없다면 우리의 노인일자리법은 빈 껍데기가 될 것인가? 그럴 것이다. 현재 재정지원 예산의 대부분은 일자리사업 및 사회활동지원사업 참여인력의 임금이나 활동비(보수)로 지급되고 있다. 일자리(고용)는 민법에도 나와 있듯이 보수와 노동(노무제공)의 교환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보수의 제공방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당연히 금전이라 생각할 것이다. 근로기준법도 근로자의 임금은 통화(通貨)로 직접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노인일자리 사업에서 참여인력은 근로자로서 임금을 받거나 자원봉사자로서 활동비를 금전으로 받는다. 거기에는 시간과 장소의 속박과 금전적 거래관계로서의 노동이 존재한다. 자원봉사로 보이는 공익활동 또한 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서 노동과 교환되는 것이 반드시 금전만은 아니다. 가족의 식사와 요리, 아이 돌보기, 마을에서의 장례와 식사, 이웃 간의 돌봄과 품앗이는 그 교환의 방식이 호혜적·순환적이고, 그 보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늦게나마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오기도 한다. 또한 그 보답이 금전적인 것이 아닌 되갚음 노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을 때에는 금전적 가치와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현재 노인일자리사업의 공익활동은 근로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서 노노케어나 복지시설 등에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봉사를 하고 그 보수로 월 29만 원(2024년 기준)을 받는다. 그 보수는 현금화되어 참여노인의 생계에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장소에 속박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근로관계로서의 속성이 남아 있으며, 예산의 한계상 그 참여인력의 자격(기초연금 수급자)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돈 이외의 다른 방식은 없을까?
노인일자리법은 노인일자리 외에 그 안에 자발적 봉사 성격의 노인사회활동을 포함하고 있고, 그 안에 위에서 본 공익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노인일자리법에서 적어도 위의 공익활동은 거래가 아닌 호혜적·순환적 증여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호혜적·순환적 증여의 예를 하나 보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의 한 마을에서는 부녀회원 중심으로 겨울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에게 매일 경로당에서 점심 식사를 만들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 봉사활동의 대가로 부녀회원들은 무엇이 필요할까? 돈일까? 돈이라면 부녀회원은 단시간 근로자나 배달원을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냥 봉사 자체일까? 일면적인 봉사라면 그것은 단발적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동등한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면 그 부녀회원에게는 나중에 나이 들어 자신도 그런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이루어져 그러한 기회가 나중에 주어진다면 그 부녀회원은 자신의 증여(노인들에게 제공한 식사마련)를 나중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돌려받는 호혜적·순환적 증여의 참여자가 된다.
그런데 복지제도에서 모든 서비스에는 수급자격이 있는 것처럼 위와 같이 돌려받기 위해서는 그 일(노동)을 했다는 증표가 필요하다. 그것은 최근에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앱에서처럼 확인하고, 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노인일자리나 사회활동에서 화폐가 노동을 교환적으로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여로서의 노동 자체가 호혜적으로 순환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가의 예산을 자양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되는 증여로서의 자발적 노동을 자양분으로 하는 것이다.
노인일자리법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7년 전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1년 후면 초고령사회로도 진입할 것이다. 본 잡지의 제목은 고령사회의 삶과 일이다. 글을 쓰는 필자도 중년쯤의 나이가 되어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돌봄과정에서의 여러 현실을 겪는다. 국가로서는 경제사회적 또는 인구학적 측면에서 고령사회의 현실을 접근하겠지만 개개의 가정이나 개인의 입장에서도 현실의 자신과 가족의 돌봄의 문제를 장기간 안고 지내게 된다. 지금은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근로관계에서는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가족 돌봄을 위한 휴가·휴직, 근로시간 단축 등이 제도화되어 있으나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노인의 돌봄은 자기돌봄, 가족이나 이웃, 지역사회에서의 돌봄이 아니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과 같은 시설화된 공간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 가족은 이제 직접적 돌봄을 지속할 만큼 그 숫자가 많지 않고,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그러한 돌봄에 참여할 만한 관계에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최후의 공간이 되고 있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 입원이나 입소도, 그 비용은 건강보험이나 장기요양보험에서 일부 충당되지만 국가와 가족 모두에게 지속가능성이 있지는 않고, 권할 만한 것도 아니다.
노인일자리사업에 대한 국가의 현실적 목적은 빈곤노인의 생계(현금)지원일 수 있고, 실제 참여노인도 그러한 구체적 목적에 의해 참여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인일자리법은 참여노인의 일(노동)의 의미와 목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내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노인이 참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의 미래를 유지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야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지역 내에서 노인들이 커뮤니티를 유지하면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일(입원이나 진료 동행, 외출 등 활동지원, 공동 식사, 장례 지원, 말동무 등)에 노인일자리사업 및 사회활동 사업의 중심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앞서 보았듯이 시간과 장소에 속박되는 형태의 일이 아니라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해 그러한 돌봄이 서로 연결되고, 확인되고, 요청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노인일자리법은 지역 내에서의 노인들 사이의 안부와 안녕을 물을 수 있는 돌봄 공동체를 향하여야 한다.
신권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