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제8호 권두언

‘돌봄 부담’과 ‘시설수용의 죄책감’, 그 진퇴양난을 벗어나려면

김용익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지역사회통합돌봄 #돌봄부담 #전국민돌봄보장
“부모님이 가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고, 가족은 그 짐을 감당하지 못해 부모님을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로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모님은 가족과 단절된 채 외롭게 죽음을 기다린다.” 피하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마주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의 노인 10명 중 8명은 요양병원, 요양시설에서 임종을 맞는다. 심한 신체·정신 장애인들은 시설과 병원에 갇혀 일생을 산다. 여성들은 돌봄 부담으로 경제사회 활동을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가족들은 고달픈 돌봄 부담이냐, 부모님의 시설수용에 대한 죄책감이냐의 진퇴양난 함정에 빠져 있다. 그리고 노인, 장애인, 환자들은 격리와 감금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 국민소득 3만 5천 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의사,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과 사회복지사가 집으로 방문하였더니 10명 중 8명이 집에서 임종을 맞을 수 있었다. 일본은 장애인 10명 중 8.5명이 살던 지역사회에서 살아간다. 지원주택,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면 심한 신체·정신 장애인들도 자기 집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돌봄 부담을 없애주면 여성도 자기의 삶을 성취하며 살 수 있다. 그 플랫폼은 ‘지역사회 돌봄’이다.
‘지역사회통합돌봄’은 노인, 신체·정신 장애인들이 시설과 병원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보건의료, 사회복지, 요양 서비스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이 돌봄 노동과 비용의 무거운 부담을 지지 않도록 국가와 지자체가 지원한다. 고혈압·당뇨병, 희귀 질환, 암 환자도 가정 방문으로 관리를 받게 되고 환자들은 병원에서 일찍 퇴원하여 집에서 사후 관리를 받을 수 있다. ‘탈가족화’로 가족의 돌봄 부담을 없애주는 것이다.
지역사회 돌봄이 필요한 분들은 7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전국민에게 돌봄서비스를 보장해 주는 ‘전국민돌봄보장’ 제도를 실현하려면 집마다 찾아가는 방문 보건, 방문복지 서비스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사회복지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 50만 명의 전문인력이 있어야 한다. 의사도 방문 진료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복지관, 보건소, 의원들의 기존 시설을 활용하되 필요하면 과감히 늘려야 한다. 노인, 장애인들이 아침부터 8~12시간 나가서 각종 프로그램을 하고 오실 수 있는 주야간보호센터가 동네마다 있어야 한다. 전국적으로 5만 개가 필요하지만, 현재는 4,900여 개뿐이다. 현재 어린이집과 유치원 수가 4만 5개인데 이와 비슷한 규모가 되어야 충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노인과 장애인들이 사실 수 있는 ‘노인·장애인 복지주택’이 저렴한 임대료의 장기임대주택으로 100만 채쯤 대량 공급되어야 한다. 공동 식당과 거실, 주야간 당직실이 있어 결식, 고독, 위기 대응의 걱정 없이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 ‘자기 집’을 마련해 드려야 한다. ‘탈시설화’로 노인, 장애인이 최대한 집(지역사회)에 있다가 꼭 필요할 때만 일반병원, 요양병원, 요양시설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못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퇴원이나 퇴소를 할 수 있다. 본인의 상태에 맞게 일반병원, 요양병원, 요양시설, 지역사회 등을 적절히 선택하는 순환 돌봄(Rotation Care)을 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가정이든 돌봄 부담과 비용 부담 없이 노인, 장애인, 환자들이 최대한 집에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전국민돌봄보장 제도를 IMF 경제 위기 이후 복지제도를 정비할 때부터 차근차근 구축해왔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대 정부들이 그러지 못했고, 너무 소극적이었다. 고령화, 저출산, 양극화 대응의 핵심인 돌봄 보장을 더 이상 미루고 있을 수 없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추진해 가야 한다. 전국민의료보장에 도달하는 데 12년이 걸렸으며, 노인장기요양보험도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전국민돌봄보장을 구축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다. 그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냐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방문, 주야간 보호, 지원주택 확충 등에 많은 돈이 들겠지만 10~20년 동안 단계적으로 구축해 가기 때문에 한꺼번에 큰 비용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런 투자가 이루어지면 전국민돌봄보장은 많은 서비스 일자리를 창출한다. 돌봄에서 해방된 여성, 건강한 노인, 능력 있는 장애인들이 이런 일자리를 통해 경제·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전국민돌봄보장은 가계수입을 늘려 소외와 불평등을 줄이고 인적 자본을 축적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또한 노인, 장애인, 환자들이 집에서 생활하려면 각종 의료기기, 복지용구 등이 필요해지고 이를 위해 국가 예산, 건강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등에서 급여를 확대해야 한다. 이는 의료기기산업, 고령 친화 산업, ICT 산업의 발전을 크게 촉진할 것이다. 각종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커지기 때문에 정보산업과 4차산업혁명에도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렇듯 돌봄에 들어간 돈을 비용으로만 보는 협소한 관점에 갇혀서는 안 되고 투자로 보는 큰 관점이 중요하다. 투자된 돈은 가계와 기업 활동을 통해 점차 세금으로 회수된다. 투자와 회수가 나선형으로 반복되면서 경제는 순환한다. 결과적으로 돌봄은 비용 대비 효과성이 월등히 크다. 돌봄은 고령화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전국민돌봄보장은 모든 가정의 생활적 과제이자 국민에게 절실한 시대적 과제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적 여론을 바탕으로 여야 모든 정당이 당론으로 수용하게 해야 한다. 시도와 시군구 자치단체도 돌봄 대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해야 한다. 주야간보호센터는 시군구도 만들 수 있고, 노인·장애인 복지주택은 시도가 지을 수도 있다. 돌봄의 발전에는 지방자치의 공간이 매우 넓다. 지역 운동을 통해 돌봄 정책이 지방에서 중앙으로 상향식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국민돌봄보장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여는 돌파구임이 분명하다. 이 운동과 사업에 모두 합심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용익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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