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OTT 플랫폼에서 조용한 화제를 모았던 영화 <사람과 고기>는 홀로 사는 노인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관계는 끊어졌고 소득은 불안정했던 이들은, 고깃집에서 배를 채운 뒤 값을 치르지 않고 자리를 뜨는 이른바 ‘무전취식’이라는 위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마침내 새로운 관계를 맺어갑니다. 웃다가도 이내 씁쓸해지는 이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던 것은, 그것이 바로 지금 2026년 우리의 자화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AI 3대 강국을 이야기하고,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025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약 3만 7천 달러였고, 한국은행은 곧 4만 달러에 근접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한국은행, 2026). 그러나 같은 시간, 우리 사회의 다른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숫자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2025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05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3%를 넘어섰지만, 66세 이상의 상대적 빈곤율은 여전히 39.8%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국가데이터처, 2025a). 지난 십수 년간 노인빈곤율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인 열 명 중 네 명은 빈곤선 아래에 있는 셈입니다.
또한, 2024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회원국 중 가장 높았습니다. 이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그 수치는 가파르게 올라가 70대는 35.6명, 80세 이상은 53.3명에 이릅니다(국가데이터처, 2025b). 2024년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답한 고령자가 세 명 중 한 명(35.5%)에 그친다는 조사 결과(국가데이터처, 2025a)와 겹쳐 놓고 보면,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소득의 문제를 넘어 존엄과 관계의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영화 속 세 노인이 찾아 헤맸던 것도 밥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고군분투해 온 제도들이 있습니다. 공적연금제도와 노인일자리사업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1년 46.5%였던 노인빈곤율은 꾸준히 낮아졌는데, 같은 기간 시장소득 기준 빈곤율은 오히려 57.0%에서 57.9%로 소폭 높아졌습니다(이원진, 2025). 노인의 시장 형편이 나아져서 빈곤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의 성숙과 기초연금의 인상이라는 공적 노후소득보장의 힘으로 빈곤이 줄었다는 뜻입니다. 공적연금은 가족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며, 노인들이 더 이상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노후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국민연금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시기에 그 빈틈을 실질적으로 메워온 것은 기초연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26년 현재 기초연금은 800만 명에 육박하는 어르신께 지급되고 있고, 최근 정부는 더 빈곤한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액을 인상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초연금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우리 노인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렵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노후소득보장의 역사에서 기초연금이 감당해 온 몫은 앞으로도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기초연금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우리 노인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렵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노후소득보장의 역사에서 기초연금이 감당해 온 몫은
노인일자리사업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2004년 첫걸음을 뗀 이 사업은 올해로 2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으며, 2026년에는 115만 2천 개라는 역대 최대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보건복지부, 2026). 초기에는 공익형을 중심으로 시작해 시장형 등 여러 유형을 운영했고, 이후 노인역량활용형, 공동체사업단으로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최근에는 유아돌봄과 같이 지역사회의 절실한 필요와 맞닿은 특화형 일자리도 시범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미덕은 소득의 공백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 나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는 동료가 있다는 것,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인일자리사업은 소득뿐 아니라 ‘관계와 참여’라는 목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번 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지금의 노인 세대가 처한 경제적·사회적으로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년으로 진입하게 될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 두 제도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노년에 들어서는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건강하며, 저마다의 직업적 숙련과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일자리는 여전히 소중한 것이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며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실제로 2020년대부터 1955년 이후 출생한 베이비부머들이 본격적으로 노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규모도 크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성격이 다른 노년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연금에 오래 가입해 일정한 급여를 받는 이들이 늘어나는 반면, 불안정한 고용 이력 탓에 연금에서 소외된 이들도 함께 늘어날 것입니다. 노년 내부의 이질성이 지금보다 훨씬 커진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제도가 모든 노인의 소득과 참여를 동시에 감당하려는 방식으로는 이 다양성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제도들이 각자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통합된 설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각각의 제도가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일 것입니다. 먼저 노후소득보장제도가 노후 소득에 대한 책임을 지금보다 훨씬 더 온전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노인일자리사업은 저소득 노인을 위한 소득보장의 역할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고, 대신 관계와 참여를 원하는, 그리고 저마다의 역량과 숙련을 지닌 모든 노인을 위한 생산적인 일자리 사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제도가 다른 제도의 짐을 떠안는 관계에서 벗어나,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관계로 나아가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사실 노인일자리사업을 빈곤 완화의 수단으로 과도하게 혹은 보편적으로 활용하는 구조에는 몇 가지 곤란함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건강이나 돌봄의 사정으로 일자리에 참여할 수 없는 노인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합니다. 참여 여부가 곧 소득의 많고 적음을 가르는 구조는, 아무리 선한 의도로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의 정당성을 잃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노인빈곤이라는 문제는 본래대로 국민연금, 기초연금, 기초생활보장과 같은 현금소득보장제도가 책임지는 것이 옳습니다.
노인일자리사업이 지급하는 급여는 단순한 활동비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한 가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자 일종의 ‘참여소득’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고령사회에서 이보다 더 값진 정책적 자산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전환이 실제로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노후소득보장제도가 최저 수준의 삶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공적이전은 노인빈곤율을 약 20%포인트 낮추는 데 그치는 반면,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그 효과가 68%포인트에 이릅니다(이원진, 2025).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적어도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는 노인이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소득과 재산을 가진 노인들 역시 그에 걸맞은 사회적 부담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이는 노인일자리사업이 저소득층만을 위한 사업을 넘어 모든 노인을 위한 사업으로 거듭나고, 노후소득보장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노년기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나누어 짊어져야 할 몫이며, 여기에는 이미 충분한 자산을 가진 노년층의 몫도 포함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첫 번째 조건도 지속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셋째, 노인일자리사업은 이제 ‘참여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활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노인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직접 창출해 내는 주체로 등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인이기에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암묵지와 숙련, 그리고 노년의 삶을 직접 살아본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이해는 다른 세대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자산입니다. 노인을 돌보는 일, 지역의 기억을 기록하고 전하는 일, 소멸해 가는 지역에서 생활 서비스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서 이들이 만들어낼 사회적 가치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내려주는 방식의 일자리 공급을 넘어, 노인 스스로가 활동을 기획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역 소멸이 빠르게 진행되는 농산어촌에서는 돌봄과 생활 서비스의 공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그 공백을 가장 잘 메울 수 있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들일 것입니다. 지역의 문화를 소개하고 남기는 작업 역시 그들의 몫입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퇴한 기술자와 교사, 상인과 공무원이 지닌 숙련은 적절한 판만 마련된다면 얼마든지 사회적 쓸모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이때 노인일자리사업이 지급하는 급여는 단순한 활동비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한 가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자 일종의 ‘참여소득’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고령사회에서 이보다 더 값진 정책적 자산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노후소득보장제도와 노인일자리사업은 서로의 부족함을 불완전하게 메워주는 관계에서 벗어나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새로운 상생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두 제도 사이에 남아 있던 목적의 모호함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무전취식이라는 씁쓸한 방식이 아니라 떳떳하게 마주 앉아 나누는 밥 한 끼로 우리 시대 노인들의 이야기가 다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노인일자리사업의 다음 20년이 바로 그 이야기를 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 국가데이터처. (2025a). 『2025 고령자 통계』. 2025. 9. 29. 보도자료.
• 국가데이터처. (2025b). 『2024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2025. 9. 25. 보도자료.
• 보건복지부. (2026). 「2026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추진계획」. 2026. 2. 2. 보도자료.
• 이원진. (2025). 노인 빈곤, 계속 낮아질 수 있을까?. 『보건사회연구』, 45(2), 1-3.
• 한국은행. (2026). 「2025년 4/4분기 및 연간 국민소득(잠정)」 및 관련 설명자료.
최영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