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노인일자리사업이 시행 20년째를 맞은 올해, 우리 사회는 어느덧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인 시대에 들어섰다. 그동안 일자리는 2만 5천 개에서 109만 8천 개로, 예산은 213억 원에서 2조 1,847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는 노인일자리사업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필요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다.
노인일자리사업은 단순히 노년기 빈곤율을 낮추기 위한 소득보전 정책에 그치지 않았다. 노인들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자존감과 효능감을 유지하도록 돕고, 지속적인 활동과 교류를 통해 건강과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은 우리 지역 곳곳의 돌봄 인프라를 보완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성장했다. 아동의 안전한 등하교를 지키는 일부터,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지원하는 일, 공공시설을 관리하고, 쾌적한 마을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까지. 누군가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지역의 적소마다 노인일자리사업이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노인일자리사업이 단순한 노인복지정책이 아니라, 공동체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축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농촌에 필요한 돌봄
농촌은 매우 가파르게 고령인구가 늘고 있다. 청년층의 유출과 맞물린 인구 감소까지 이어지면서 이제는 소멸에 대한 위기감까지 감지된다. 귀농·귀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추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사이 농촌의 삶의 여건은 악화되었다. 이·미용실, 목욕탕, 세탁소, 동네 슈퍼, 식당, 약국 같은 필수적인 생활 서비스 시설이 줄었고, 경영난에 부딪힌 운수업체는 운행 횟수를 줄이거나 노선을 폐지했다. 마을에는 빈집이 늘고, 마을 안에서 서로를 돌보던 구조도 과거에 비해 희미해졌다. 그나마 농촌에 여전히 남아있는 공동체 전통은 농사일, 집안일, 마을 일을 동시에 감당하는 부녀회 덕분에 명맥을 이어간다.
이러한 변화는 곧 돌봄의 공백으로 이어졌다. 병원이나 약국에 가는 길은 멀어졌고, 장을 보러 가는 일도 쉽지 않다. 도움을 줄 이웃은 줄어들어 전구를 갈거나 무거운 짐을 드는 일조차 해결이 어렵다.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작은 도움부터 긴급한 돌봄까지, 농촌에는 채워야 할 공백이 많다.
2026년 본격 시행을 앞둔 『의료·요양 등 지역돌봄이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 (이하 돌봄통합지원법)은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의 욕구를 중심으로 의료·요양·복지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제도다. 도시에 비해 ‘지역사회 계속거주(Aging in Place)’ 수요가 높은 농촌에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농촌에 필요한 돌봄은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건강과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었을 때 제공되는 전문 서비스 외에도 일상생활과 맞닿은 돌봄 수요가 크다. 전구 교체나 수도 누수 같은 집수리, 벌초와 풀베기 같은 주변 정리. 대형 빨래 세탁, 쓰레기 처리, 원격지 택배 수령까지 생활 곳곳에서 작은 손길이 필요하다. 또한, 생필품 구입, 외출 동행, 공동식사 마련과 같은 일상 지원, 마을 길·배수로·공동 시설 관리까지도 포함된다. 이는 기존 돌봄 사업만으로는 채워지기 어려운 영역이다. 전문성이 높거나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상호연대 속에서 꾸준히 힘을 보태야 하는 일들이다. 결국 농촌에서 필요한 돌봄은 도시와는 다른 환경과 공동체 구조를 반영한다.
노인일자리사업의 가능성
노인일자리사업은 이처럼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농촌 돌봄을 위한 실행력을 제공할 수 있다. 제도권 돌봄사업처럼 엄밀한 자격요건이 필요하지 않고, 욕구와 필요에 따라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동시에 참여 노인에게는 사회적 유용성과 유능감에 더해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오롯이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일정한 소득까지 제공하는 엄연한 일자리이므로 돌봄 제공의 지속성도 담보할 수 있다. 노인일자리사업을 통해 개인의 복지 증진을 넘어, 공동체의 유지와 활력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노인이 일한다 = 마을이 유지된다.”는 공식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일부 비판도 있다. 가뜩이나 농업 인력이 부족한 판국에 노인들을 일자리사업에 붙들어 두는 게 맞느냐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노인일자리사업이 정작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본래의 취지가 흐려졌을 때 생겨나는 불만이다. 지역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공공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을 메우는 것, 이것이 노인일자리사업의 진짜 강점이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그 힘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홍성군 장곡면 주민자치회는 주민참여예산으로 마을 빨래방을 만들고, 노인일자리 참여자들을 투입해 운영 중이다. 앞으로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한 수거·배달 서비스로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충북 진천군은 지역사회통합돌봄 선도사업을 추진하면서, 노인일자리 참여자들과 함께 사회적 취약계층을 돌보는 돌봄농장(생거진천 케어팜)을 운영하고 있다. 춘천시에서는 ‘나이들기 좋은마을’을 내걸고 반찬 나눔, 이·미용 서비스, 병원 이동서비스 등을 담당하는 이웃복지사들이 노인일자리사업을 통해 활약 중이다.
앞으로의 과제
농촌에서 노인일자리사업이 돌봄의 새로운 기반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지역의 우선적인 필요를 반영한 맞춤형 사업 기획이 필요하다. 농촌은 마을 규모, 인구 구조, 생활기반시설 등에서 차이가 크다. 중앙정부가 일률적으로 정한 사업이 아니라, 지자체와 마을 단위에서 꼭 필요한 수요를 반영한 ‘농촌 맞춤형 기획’이 중요한 이유이다. 예를 들어, 교통 불편, 인구 분산, 서비스 공백을 고려한 유연한 구조를 마련하고, 마을별 특성을 반영해 활동 범위와 업무 강도를 조정하며, 계절적 요소까지 고려하는 맞춤형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수행기관은 사업 기획 시 지역 여건과 돌봄 공백을 사전에 파악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다. 이때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각 농촌 지역 여건에 맞춘 사업 운영 사례를 메뉴판처럼 제공하여, 수행기관의 전문성을 보완하고 업무 부담을 줄이는 지원을 할 수 있다.
둘째, 돌봄 인력으로서 자질과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농촌 돌봄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지만, 안전사고 예방, 개인정보 보호, 응급상황 대응 등 기본적인 실무 역량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단기간이라도 안전교육과 매뉴얼 교육을 필수화하고, 경험 많은 참여자를 ‘돌봄리더’로 육성해 현장에서 역할을 조율하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월 1회 사례회의와 피드백 시간을 통해 상호 발전을 도모하면, ‘농촌형 돌봄 인력풀’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셋째, 제도권 돌봄 사업과의 연계를 강화해 촘촘한 마을돌봄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노인일자리사업은 공적 제도의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에 강점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기존 제도와 중복·분절적으로 운영되어 효율이 떨어지기도 한다. 노인일자리 참여자가 단순 보조인력이 아닌 ‘마을돌봄의 거점 인력’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돌봄망의 설계가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노인일자리사업 참여자가 활동 과정에서 마을 주민의 위기 상황을 발견하면. 지역 보건소나 읍면 복지공무원, 사회복지기관 등과 즉시 연계하는 협업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넷째, 노인일자리사업이 농촌 공동체를 회복하고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농촌에서의 돌봄 활동은 단순히 이웃을 돕는 것을 넘어, 세대 간 연결과 주민 간 유대를 강화하며, 공동체의 회복에 기여한다. 특히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소멸 위기를 맞은 지역에서는, 노인일자리가 마을을 지탱하는 ‘공동체 기반 인프라’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노인일자리사업은 보건복지부라는 부처의 틀을 넘어 농업·농촌 정책, 지역활성화 정책과 연계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적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마치며: 농촌과 함께하는 노인일자리
노인일자리사업 20년은 고령화 사회에 대응하고, 전국 각지에서 노인이 사회적 역할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다져온 시간이었다. 농촌에서는 개인의 소득과 건강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마을의 돌봄 공백을 메우는 자원으로서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이는 노인일자리사업이 농촌에서 부족하기 쉬운 돌봄 기반을 보완하고, 지역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앞으로의 노인일자리사업은 지금까지 보여준 가능성을 넘어, 농촌 맞춤형 돌봄을 뒷받침하는 실질적 대안으로 더 발전시켜야 한다. 참여하는 노인들이 마을의 돌봄과 사회적 연결망을 지탱하고, 주민 간 유대와 공동체 기능을 강화하는 구조야말로 ‘농촌과 상생하는 노인일자리’의 모습이다.
20주년을 맞은 지금, 노인일자리사업을 농촌 공동체를 지지하는 튼튼한 기반으로 재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농촌의 내일을 열어가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김수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삶의질정책연구센터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