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다섯 가지 복 중의 하나로 고종명(考終命)을 꼽았다. 죽음을 편안하고 깨끗이 맞이하는 것이다. 많은 노인이 집에서 가족들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사망자의 75%가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호스를 매단 채 가족과 격리되어 죽음을 맞고 있다.
왜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빌리지 않아도, 또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는 톨스토이의 경구를 인용하지 않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쳐오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다.
웰다잉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을 한번 정리하고 새로운 자세로 인생을 살게 하는 중요한 중간 점검과 같다. 이는 곧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길이다. 2020년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령층 10명 중 9명은 좋은 죽음은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90.6%)이었다. 그리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고통 없는 죽음(90.5%), 스스로 정리하는 임종(89.0%)이라는 생각도 많았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우리의 미래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준비를 기피하는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닐까? 전쟁이 무섭다고 해서 전쟁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이 된다. 두려운 것일수록 더욱 준비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 세미나에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할머니에게 자기 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알게 된 때였다. 근본적인 대책이 연명치료에 대한 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듣고 나서 국회에서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했다. 꾸준한 입법 활동을 전개하여 19대 국회 말에 「호스피스 완화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백오십만이 넘는 사람이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고 있다. 말기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낄지, 심폐소생술을 받을지 등을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에 나서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인생의 모든 단계마다 결정해야 할 일이 있듯이 삶의 마무리에도 내가 결정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연명치료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화장할지, 장기기증을 할지, 유산기부를 할지, 치매에 대비해서 후견인을 정할지, 모두가 내가 결정해야 할 일들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병원이, 가족이, 법이 결정하게 된다.
유언장을 쓰는 사람이 미국은 56%에 달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0.5%도 되지 않는다. 미국은 다 쓰니까 나도 쓰는 것이고, 우리는 아무도 안 쓰니까 나도 안 쓰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건강, 재산, 사후 절차 등 삶의 마무리에 관한 일들을 내가 결정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웰다잉 운동이다.
우리 사회에서 웰다잉의 문제가 중요한 시대 과제로 빠르게 부상되고 있는 것은 고령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고령사회는 전 인구의 14% 이상, 초고령사회는 20% 이상이 노인인 사회다. 우리나라는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했는데 불과 8년 만인 2025년 전 인구의 20%인 천만 노인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세계적으로 빠른 고령화사회로 꼽히는 일본이 24년 만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면 그것을 파악하기가 힘들고, 대처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현재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웰다잉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부재한 상황이다. 정부의 노인 정책은 주로 생활 안정, 일자리 제공, 의료비 지원 등 복지정책에 머물러 있고, 노인들의 죽음 대비는 수의·묘지 마련, 상조회 가입 등 외형적인 면에 한정됐지만 삶의 마무리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입각한 준비들은 미약한 편이다.
노년 인구 천만 시대가 머지않았다. 스스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아름답고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관련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웰다잉 문화를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모든 사람이 삶의 주인으로서 삶의 마무리도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채 닥쳐오는 미래에 떠밀려가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고민하고 준비하는 품격 있고 에너지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천만의 노인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러다 죽는 거지!’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회와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결정권을 실천하는 사회의 품격과 활력이 같을 수 없지 않은가? 폴 발레리가 말한 “생각하면서 살아라.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구는 우리 삶이 아름다웠듯이 그 삶의 마무리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쓸모 있는 조언이 될 것이다.
원혜영
사단법인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